- 초상화 갤러리
- 2019-11-01
- 강주룡
- 작성자 : heradm 조회수 : 1317
작가 황재형
강주룡(姜周龍)
<유공자 정보> ◆ 운동계열 : 국내항일 ◆ 애족장(2007년)
<공훈록>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평양에서 일제의 민족 차별에 반대하는 노동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평북 강계에서 태어난 강주룡은 14세 때에 서간도로 이주하여 통화현의 최전빈(崔全斌)과 결혼하였다. 24세때 채찬(蔡燦이명 白狂雲)의 휘하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남편이 병사하자, 강주룡은 가족을 데리고 귀국하여 사리원을 거쳐 평양에 정착, 평원(平元) 고무공장의 여공으로 일하며 가장 역할을 했다. 1930대초 평양에서는 고무공장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파업투쟁이 거세게 일어났다.
1929년 세계적인 경제 공황으로 고무공업이 타격을 입자, 고무공업계는 1930년 5월 23일 서울에서 개최된 전조선고무공업자대회를 통해 임금 인하를 결의하였다. 1930년 8월 1일 평양고무공업조합이 이 결정에 따라 종래 임금의 17% 삭감을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통고하자, 노동자들은 일제와 그에 결탁한 자본가들을 비판하며 반대투쟁을 일으켰다.
강주룡은 1931년 5월 평원고무공장 파업을 주도하던 중 일경의 간섭으로 공장에서 쫓겨나자 을밀대(乙密台) 지붕으로 올라가 무산자의 단결과 노동생활의 참상을 호소하는 한편, 고용주의 비인도성을 거세게 비판하며 단식투쟁을 벌였다. 이로 인해 1주일의 구류처분을 받자 다시 6월 11일까지 54시간 단식을 결행하였다. 여장부로 신문지상의 주목을 받던 강주룡은 투옥 중 극도의 신경쇠약과 소화불량 등으로 보석 출감되었지만 병세가 악화되어 출감 두 달 만에 숨을 거두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내용 출처 -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COPYRIGHT © (사)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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