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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2-29
  • 김도연
  • 작성자 : heradm 조회수 : 401

 

 


 


작가 이기홍

 

 

김도연​​​​​(金度演​)

 

 

<유공자 정보>

 

◆ 생년월일 : (1894-06-16​​​)
◆ 사망년월일 : (1967-07-19​)
◆ 본적 : 경기도 김포 陽東 鹽倉 20​
◆ 운동계열 : 일본방면​

◆ 애국장​​​​​ ​(1991)



<공훈록> 


경기도 김포(金浦) 출신으로 일본 동경(東京)에서 거행된 재일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서 11명의 대표 중 한 사람이다.


그는 1913년 일본 금성중학교(錦城中學校)를 졸업하고, 1919년 경응대학(慶應大學) 이재학부(理財學部)를 수료하였다. 


일제의 강압에 의해 조국이 병탄되자 재일 유학생들은 항상 조국 광복의 꿈을 키워 왔다.


1916년 4월 17일 당시 재일 유학생은 모두 5백 24명이었으며, 일본 경찰은 유학생들을 항일의식의 기준에 따라 갑·을로 구분하여 항시 철저한 감시를 하였다.


특히 재일 유학생들은 각종 비밀결사 단체를 통하여 조국 광복을 위해 투쟁하여 왔다.


그는 1915년 12월 신익희(申翼熙)·김양수(金良洙)·장덕수(張德洙)·최두선(崔斗善) 등이 발기하여 창립한 조선학회(朝鮮學會)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중, 1918년 1월 17일의 간부 개선 때 백남훈(白南薰)·전영택(田榮澤) 등과 함께 동회의 서기로 선출되었다. 


이해 12월 하순, 동경 조선기독교 청년회(東京朝鮮基督敎靑年會) 주최로 y.m.c.a. 강당에서 웅변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때 연사로 나온 서춘(徐椿)·이종근(李琮根)·김상덕(金尙德)·윤창석(尹昌錫) 등은 한결같이 민족자결주의 원칙 아래 자주독립을 획득할 것을 주장하였다.


웅변대회가 끝난 뒤, 유학생들은 해산하지 않고 조국 독립운동의 방안을 강구하였다.


이 때 그는 최팔용(崔八鏞)·백관수(白寬洙)·김철수(金喆壽)·이광수(李光洙)·송계백(宋繼白)·최근우(崔謹愚)·서춘·이종근·김상덕·윤창석 등과 대표위원으로 선발되어 그들과 함께 일제의 감시를 피해가며 회합하여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신호(神戶)에서 영국인이 발행하던 영자신문인 「저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의 1918년 12월 1일자 기사에 이승만(李承晩) 등의 한국대표가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된다는 기사가 실렸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유학생 대표들과 함께 독립에 대하여 토의하고, 이듬해 1월 상순에 최팔용·윤창석·송계백·최근우·백관수·김상덕·서 춘·전영택·이종근 등과 함께 그 실행위원으로 선출되어 2월 8일을 기하여 재일본 동경 조선독립 청년단(在日本東京朝鮮獨立靑年團)의 명의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본국의 민족 지도자들과의 연락을 위해 1월 중순에 송계백을 서울에 파견하였다.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그는 실행 위원 중 전영택이 신병으로 빠지고 그 대신 이광수·김철수가 참가한 조선 독립 청년단 대표 11명중의 한 사람으로 동경 한 복판의 y.m.c.a. 강당에서 개최된 독립선언식에 참여하였다.


이때 유학생 학우회 총회의 회장인 백남규(白南奎)가 개회를 선언하고, 최팔용의 조선 청년 독립단 발족 동의, 백관수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그가 결의문을 낭독하고, 서춘이 연설을 하기 위하여 등단할 무렵, 동경 경시청에서 출동한 일본 경찰이 해산을 요구하였다.


결국 유학생들과 일본 경찰간에 대격전이 벌어져, 대다수의 참석 학생들이 체포되었다.


이때 그도 체포되어 서신전(西神田) 경찰서에 수감되었다가, 경시청으로 이감 기소되어 이해 6월 26일 제2심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 혐의로 9개월 금고형을 선고받고 동경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27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고, 1931년 다시 아메리칸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같은 해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하여 1932년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강사로 있다가 1934년 조선흥업주식회사 사장이 되었으나,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朝鮮語學會事件)에 관련되어 함흥(咸興)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고, 1945년 봄에 출감하였다.


광복 후 한국 민주당 총무로 정계에 투신, 1946년 2월 입법의원을 거쳐 그 해 12월 과도정부 입법의원으로 서울에서 당선되었다.(민선).


1948년 5월 제헌 국회의 입법선거 때에는 서대문구(西大門區) 한민당원으로 출마하여 당선, 국회 개원과 함께 재경분과 위원장에 피선되었다가, 같은 해 8월 초대 재무부 장관에 취임하였고, 한편 한·미 경제협정 교섭 한국측 대표로 활약하였다.


2대 민의원 선거 때에는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1954년 민주 국민당 최고위원으로 취임, 3대 민의원 당선 후 1955년에는 민주당 고문이 되었다. 


4대 민의원 선거 때에는 민주당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59년 11월에는 민주당 중앙위원회 부의장이 되었다.


1960년 제5대 민의원에 당선된 후 민의원 부의장에 피선되었고, 같은 해 8월에는 제 1차 국무총리에 지명되었으나, 민의원의 동의를 얻는데 실패하였다. 민주당 구파동지회를 결성하고 그해 11월에 신민당 위원장이 되었으나 1961년 5·16으로 위원 자격을 상실하였다.


1963년 11월에 실시된 6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민주당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1965년 8월 한·일 협정 국회비준을 반대하여 의원직을 사퇴하고, 같은 해 신한당 정무위원으로 피선되었다. 


저서로는 ≪나의 인생백서≫(자서전)·≪한국 농촌 경제≫(박사학위 논문) 등이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3·1운동(김진봉, 교양국사총서 31, 1977) 48~52면

고등경찰요사 153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66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501·1011·1015·1016·1088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648·654·657·849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108·120·121·126·130·133·135·142·147·152·160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24·31·40·50·1111·1447·181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