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갤러리
  • 초상화 갤러리
  • 2021-12-31
  • 김조이
  • 작성자 : heradm 조회수 : 437

 

 

작가 유지환

 

 

김조이​​(金祚伊​)

 

 

<유공자 정보>

 

◆ 생년월일 : (1904-07-05​)
◆ 사망년월일 : (미상​)
◆ 본적 : 경상남도 창원 熊川 城內 189​
◆ 주소 : 咸南 咸興 河西 興島 74​
◆ 운동계열 : 국내항일

건국포장​(2008)

 


 

 

 

 

<공훈록>


김조이는 1922년 1월 창원에서 계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 고학을 하던 중 여자고학생상조회(女子苦學生相助會)에 가입해 1926년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1월 21일 서울에서 허정숙(許貞淑)·주세죽(朱世竹)·김필순(金弼順)·정봉(鄭烽)·배혁수(裵赫手)·박정덕(朴貞德) 등과 함께 사회주의 여자청년단체인 경성여자청년동맹(京城女子靑年同盟)의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종로구 낙원동에 사무실을 연 경성여자청년동맹은 여성해방 서적 연구·토론, 여성노동자 위안 음악회 개최 등의 사업을 펼쳤고, 무산아동학원 설립, 여성을 위한 문고 설치, 학술강좌 개최 등을 계획하였다.


동년 2월 김조이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다가, 4월, ‘적기(赤旗) 시위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기도 하였다.


‘적기시위사건’이란 ‘4·21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가 경찰의 불허로 무산되자 300여 명의 대표들이 종로경찰서와 동대문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벌인 사건이었다.


1925년 4월경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 후보로 활동했으며, 11월경 고려공산청년회 추천으로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였다.


1930년 ‘조선공산당재조직준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되었으나 소재 불분명으로 기소중지되었다.


1931년 9월 하순 김조이는 코민테른(국제공산당) 동양부의 지시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김복만과 함께 귀국, 함흥을 중심으로 ‘조선노동좌익재결성’을 주도하다가 1932년 8월 일명 ‘제2태평양 노사사건’의 주동인물로 지목되어 함흥경찰서에 검거되었다.


당시 언론은 이 사건을 ‘함남공청사건’이라고 불렀다.


김조이는 이 사건으로 2년간 구금되었다가 기소되어 1934년 12월 17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미결구류 100일 통산)을 선고받았다.


함흥형무소에 수감됐다가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됐고, 1937년 9월 20일 출소하였다.


해방 후 1945년 11월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에 인천대표로 참석했고, 12월 조선부녀총동맹에 가입하였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 부녀총동맹 대의원으로 참석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고, 7월 중순경 서울에서 강제 납북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개벽(1926. 3. 1) 제66호

高等警察要史(慶北警察部) 303면

사상요시찰인연명부 추가의 건(1926. 4. 19) 검사사무에 관한 기록(3) 129면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4집 451면

일본의 한국침략사료총서(국사편찬위원회) 490~492면

東亞日報(1934. 5. 18·8. 21·12. 9)

東亞日報(1932. 2. 3)

犯罪人名簿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 1996) 121면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국사편찬위원회) 별집 제2집 536면

高麗共産靑年黨員 檢擧 應援의 件(1925. 12. 3) 검찰사무에 관한 기록(1) 924면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朝鮮中央日報(1934. 1. 1·12. 12·1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