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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6 [원희복의 인물탐구]외면당한 여성독립운동가 발굴하는 전 국회의원···김희선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장 [경향신문]
이름   관리자    |    작성일   2018-06-14 10:01:23    |    조회수   69

[원희복의 인물탐구]외면당한 여성독립운동가 발굴하는 전 국회의원···김희선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장

글 원희복 선임기자 · 사진 우철훈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기자

 

입력 : 2017.08.06 11:03:00 인쇄글자 작게글자 크게

 

[원희복의 인물탐구]외면당한 여성독립운동가 발굴하는 전 국회의원···김희선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장

매년 8월이 되면 가슴이 시린 사람이 많다. 광복절 때문이다. 독립운동가(후손)들은 더욱 그럴 것이다. 그나마 천만 다행인 것이 친일 역사교과서를 만들려는 친일·유신세력을 촛불의 힘으로 물리친 것이 조금 위안이 된다. 오래전부터 그 친일·유신세력과 맞선 여장부가 있다. 김희선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장이다. 그는 국회의원 시절인 2001민족정기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을 만들어 친일진상규명법, 친일파재산환수법, 징병·징용자보상법 등 일제 강점하의 진실을 규명하고 아픔을 위무하는 법안을 많이 만들었다. 요즘은 여성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선양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2010년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과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등과 함께 있는데, 이 소장이 국민은 여성독립운동가로 유관순밖에 모르는데 이래서 되겠냐면서 남자현 열사 책을 주더라. 그 책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 남자현 열사는 예순넷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대한독립을 전 세계에 알린 여성 안중근이다. 윤희순 의병장은 왜놈 대장 보거라라는 격문을 써 여성 의병을 독려한 사람이었다. 화가 났다. 바로 기념사업회를 만들겠다고 해 만들었다. 기념사업회의 제일 중요한 것이 교육과 홍보라 생각해 강좌도 열었다.”

 

 

외면당한 여성독립운동가들 발굴

기념사업회는 우선 여성독립운동가를 알리는 강좌를 열기로 했다. 이미 많이 알려진 인물 말고, 잊혀진(의도적으로 외면한) 인물을 추렸다. 그는 주세죽은 안된다고 해서 내가박헌영 부인이라도 무슨 상관이냐, 독립운동한 것이 사실이면 됐다고 일축했다. 이렇게 해서 모스크바 붉은 별 주세죽, 의열단에서 조선의용대 박차정, 한국 최초의 볼세비키 혁명가 김알렉산드라, 태항산의 백마를 탄 여장군 김명시, 1932년 상하이 홍커우 의거의 숨은 기획자 이화림,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허정숙 등 6명의 외면당한여성독립운동가를 발굴해 강의했다.

518일부터 622일까지 매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한 강좌는 호응이 컸다. 당초 50~60명을 예상했지만 200석 가까운 강의실이 꽉 찼다. 영화배우 김혜수는 6주에 딱 두 번 빠지고 계속 참가했다. 그는 강의에 참석해 나를 꼭 안아주며 고맙다고 하는데 얼마나 신통해라고 말했다.

 

이번 광복절에도 의미 있는 행사를 한다. 작년 가을부터 기획한 것으로, 292명의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초상화를 제작해 광화문광장에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까지 추모대행진하는 것이다.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중에는 초상화가 없는 이들도 많다. 이런 인물은 최대한 문헌과 유품 등을 통해 최적의 이미지를 창작하기로 했다. 김 회장은 강주룡의 을밀대 고공농성 장면을 머리카락 그림으로 유명한 황재형 화백이 그렸다고 말했다.

 

정신대대책위는 일제하 여성 피해자 모임이고, 우리는 여성 투쟁가들 모임이다. 둘 다 중요하다. 우리 여성들 결기 있다. 한규설(구한말 대신) 부인이 얼마나 대단한 여자인가. 한규설이 을사늑약 도장 받으러 고종에게 간다. 부인은 남편이 도장을 받지 못하거나 받으면 자결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도 죽으려 독약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이 고종 도장을 받고 그냥 온 것이다. 부인은 문을 걸어 잠그고 단식했다. 우리 여성들 그런 결기가 있다. 행주산성에서 이어진 결기다.”

 

그가 독립운동에 매달리는 이유는 시대정신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집안 내력 요인도 적지 않다. 그는 광복군 제3지대장을 지낸 김학규 장군의 손녀다. 김학규 장군은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독립당·임시정부 등에서 활동하다 조선혁명군 참모장, 광복군 제3지대장을 지냈다. 해방 후 한독당 조직부장으로 김구·이승만 등과 활동했다.

 

 

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 장군의 손녀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은 그를 가짜손녀라고 보도해 논란이 됐다. 족보가 다르다는 것이다. 전후 사정을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김 회장의 증조할머니가 의성 김씨와 결혼했다가 남편이 죽자 자녀를 데리고 안동 김씨로 재가를 하면서 빚어진 일이다. 족보와 호적을 둘러싼 논란은 결국 법정까지 가 2006김희선과 김학규는 법적으로 혈연관계가 존재한다는 판결을 받았다.

 

 

-보수언론의 이 같은 보도는 친일 청산작업에 대한 보복 측면이 강했다.

그렇다. 내가 만든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 모임에서 방응모·김성수·김활란 등 친일파 명단을 발표했다. 명단 발표를 하기로 한 의원은 겁을 먹고 기자회견장에 나오지 않아 결국 내가 발표했다. 그 자리에서 김삼웅 독립기념관장과 조동걸·서중석 교수는 내 생전 이 명단 공개 못하고 죽을 것으로 생각했다며 감격에 겨워 울었다. 이후 친일진상규명법(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 때 의원들과 만들면 기밀이 샐까봐 아름다운 가게를 하던 박원순 현 서울시장의 도움을 받아 몰래 만들었다.”

 

-보수언론은 김 회장의 부친이 만주에서 일제 특무로 활동했다고 보도했다.

김학규 할아버지는 해방 후 북한 사람들의 남한 정착을 도와주는 정부기관 책임자였고, 아버지는 그 밑에서 일했다. 당시 같이 일하던 사람이 김학규 조카라고 다 증언했다. 아버지는 김구 선생 심부름으로 북한에 세 번이나 갔다. 일본 경찰을 했으면 김학규 할아버지 밑에서 정부 일을 일을 하고, 김구 선생님 심부름을 했겠나.”

 

김 회장은 1943년 김학규 장군의 고향인 평남 평원에서 태어났다. 해방 후 할아버지를 따라 서울·경기 등에서 자주 옮겨 살았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김구 암살범 안두희를 한독당에 입당시킨 책임으로 화를 당했다. 김 회장은 초등학교 때까지 할아버지와 한 집에서 같이 살았다면서 그때 할아버지가 오장동 버드나무집에서 안두희 입당시킨 것이 잘못이라는 말을 자주했다고 말했다.

 

대전여상을 중퇴한 그는 한전에 입사했다. 아버지와 같이 독립운동을 하던 박영준 당시 한전 사장이 그를 취직시켜준 것이다. 한전에서 남편(방국진·4월혁명회 공동의장)을 만나 결혼, 한전 사내커플 1호가 됐다. 그는 마을 쓰레기 처리문제로 구청하고 싸우기 시작하면서 사회·여성운동을 시작했다. 1974년 서울YWCA 주부클럽중앙회 부회장, 1976년 서울YWCA 소비자모니터 회장이 됐다. 그는 이화여대 졸업자가 즐비한 YWCA에서 여상 중퇴 출신인 내가 부회장·회장이 된 것은 기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1978년 크리스찬아카데미 여성사회연구회 부회장으로 강원룡 목사와 한명숙 전 총리 등을 만나 의식화가 됐다. 그는 강원룡·한명숙을 만나 정치·여성·역사인식을 깨우쳤다면서 그들을 만나 여성의 인간화 운동을 위해 평생 살겠다는 맹세를 지금껏 지키며 산다고 말했다. 여성의전화 대표(1984), 한국여성단체연합 부회장(1987)을 하다 1994DJ(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김근태·추미애 등과 정치권에 입문했다. 그는 서울 동대문, 추 변호사는 서울 광진에서 각각 출마했지만 그는 낙선하고 추 변호사만 당선됐다. 결국 그는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재기했다. 당시 여성 지역구 의원은 여야 통틀어 그와 추미애·박근혜 의원 3명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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