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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1-08
  • 조애실
  • 작성자 : heradm 조회수 : 375

 

 

작가 박야일

 

 

조애실(趙愛實)

 

 

<유공자 정보>

 

◆ 생년월일 : (1920-11-17)
◆ 사망년월일 : (1998-01-07)
◆ 본적 : 함경북도 길주 吉北 521
◆ 주소 : 서울 道峰 水踰 472-138
◆ 운동계열 : 국내항일

◆ 애족장(1990​​)

 


 

 

 

 

<공훈록>
 

 

함북 길주(吉州) 사람이다.

 

1932년 명천읍(明川邑) 공립국민학교를 졸업한 그는 함북 아오지(阿吾地)탄광의 광산촌에 거주하면서 1940년 1월 중순 야학을 설치하여 부녀자들에게 문맹퇴치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러던 중 1941년 3월 일경에 피체되어 3개월간에 걸친 가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유치장에서 병을 얻어 석방되었다.

 

1942년 상경한 그는 교회에서 알게 된 전영신(全榮信) 등의 부녀자들에게 한국인으로 태어나서 그 역사와 문자를 모르는 것은 슬픈 일이라고 하며 ≪단종애사(端宗哀史)≫·≪이차돈(李次頓)의 죽음≫ 등의 소설과 한국의 역사와 한글을 공부할 것을 권하는 등 민족의식의 고취에 힘썼다.

 

1944년 6월에는 기독교 감리파소속 동대문교회의 주일학교 교사가 되어 학생들에게 한국의 여성들은 고려시대의 충신 정몽주(鄭夢周)의 어머니처럼 조국에 충성을 다할 수 있는 자녀를 양육하여야 한다고 역설하였으며 정감록(鄭鑑錄)의 내용을 인용하여 조국의 독립이 멀지 않음을 주지시켰다. 

 

또한 일본어 상용이 강제되고 있으나 한글도 못 읽고 한국말도 못한다면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니 한국어를 사용하자는 내용의 설교를 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44년 10월 5일에는 부녀자들에게 현제명(玄濟明)이 작곡한 조선의 노래라는 제목의 악보를 보이며 이 노래를 애창하자고 권유하였다.

 

이와같은 활동을 펴던 중 그는 일경에 피체되어 1945년 4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형을 언도받았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판결문(1945. 4. 26 경성지방법원)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2권 1124·1125·112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