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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1-06
  • 임봉선
  • 작성자 : heradm 조회수 : 363

 

 

작가 정세학

 

 

임봉​​​(林鳳善) 

 

<유공자 정보>

 

◆ 생년월일 : (1897-10-10)
◆ 사망년월일 : (1923-02-10​​)
◆ 본적 : 경상북도 칠곡 仁同面 眞坪洞 517
◆ 운동계열 : 3.1운동

◆ 애족장​(1990​​)

 


 

 

 

 

<공훈록>


경상북도 칠곡(漆谷) 사람이다.

1919년 3월 8일의 대구(大邱) 서문외(西門外)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곳은 2월 24일 경상도 독립만세운동의 연락책임자였던 이갑성(李甲成)이 대구에 내려와, 제일교회에서 기독교계의 유지 이만집(李萬集)·이상백(李相柏)·백남채(白南埰) 등과 만나 국내외의 정세를 설명하고, 3월 2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상(李容祥)을 통하여 2백여매의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면서부터 독립만세운동이 계획되었다. 당시 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 교사인 임봉선은 이 계획에 찬성하였는데, 마침 자기를 찾아온 김무생(金武生)·박제원(朴齊元)으로부터 서울과 평양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 때의 여성의 활약상을 전해듣고, 이에 적극 참여하기로 결심하였다.

 

한편 계성중학교(啓聖中學校)·대구고보(大邱高普)·성경학교(聖經學校) 학생들과도 연락을 취하여 3월 8일의 서문외 장날을 이용하여 연합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8일 오후 3시경, 임봉선은 50여명의 신명여학교 학생들을 인솔하고 시장에 나아가, 1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합세하여 시가지를 행진하였다.

 

그러나 임봉선이 시위군중과 함께 경찰서 앞의 제지선을 뚫고 중앙파출소를 돌아 달성군청(達城郡廳)앞의 삼각지에 이르렀을 때, 6대의 기관총을 설치해 놓고 대기중이던 일본군 80연대와 대치하게 되어 부득이 행진을 정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일본군·헌병·경찰은 시위대열로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시위군중을 구타하며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현장에서 많은 시위군중이 체포되었는데, 임봉선도 함께 체포되었으며, 이해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270·271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265·1268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349·352면